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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0. 20世 〉26. <부정공>향산공휘상효행장(香山公諱尙孝行狀)
1. 문헌 목록 〉20. 20世 〉28. <부정공>술암처사공휘선호묘표(述菴處士公諱善浩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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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부정공>만회공휘재호묘지명(晩悔公諱在浩墓誌銘)
晩悔公諱在浩墓誌銘 趙生俊燮從余遊旣久以其祖考晩悔公幽堂之誌屬余曰吾祖文行才猷足可有爲於世而不顯其名竟沒韋布俊燮甚恫焉敢要一言以圖不朽余感其誠遂按狀而叙之公諱在浩字德賢世家玉川冑於高麗大將軍諱璋屢傳至門下侍中諱元吉策勳封府院君封諡忠獻生諱瑜副正岡僕於我朝子兵使諡節愍諱崇文孫贈敎官諱哲山爲莊陵殉節並旌兩世公曾大父諱顯穆行義著於鄕黨 贈左承旨大父諱基在 贈戶曹參判考諱鎭忠妣羅州吳氏通政相龜女公生於純祖戊辰二月八日以今上壬午七月二日卒壽七十五公天姿端穆自幼以遠器期之知府金公鼎均見而亟稱之事親盡誠以承顔順志爲務居憂毀瘠三年疏食承祭齋潔如或不參整冠達朝因心篤友常會一室履怡怡有春津之樂處家有度務尙儉約洋染不許家人用之敎子姪待族戚各盡其道於朋友亦然奇孝悌之推也重然諾喜施與不以貧窮爲念固守廉介禔躬謹拙平日書籍必寫崇禎年號曰吾是大明遺民也丙寅洋宼深八遠近洶洶邑宰問以堡障之策輒皆委任公墳惋以爲我若當寧陵之世遼薊風雪許同驅馳則與虜爭衡豈後於人哉是公素蓄之志也壬午占鄕解兩場先是人或勸其冒籍加年二求捷徑公曰欺郡而取科吾不忍爲之也夏赴南省以軍變未試遂冒署還鄕遘疾及革整衿起坐言後事甚悉少無恒化意明月葬于順天府西住巖面龍岡村艮之原廣州李氏祔左公有二配俱無育李氏考名鎭來珍原朴氏嘉善敏煥女貞順有婦德公取仲兄翰浩子秉恩爲后有三男一女俊燮其長次璣燮斗燮女適金華壽嗚呼公操守淸愼敦尙志節日用事爲恥循流俗其所行義不出於家使需世之器虛擲於林泉豈不惜哉然旣篤於內行則又何有於外慕斯可以爲銘也己銘曰姿出於天匪公致力行篤於身亦可範俗不朽者存其餘可略龍岡之原水淸山肅我發潛光昭示千億 德殷 宋秉璿 撰 만회공휘재호묘지명(晩悔公諱在浩墓誌銘) 젊은 조 준섭(趙後燮)은 오래전부터 나를 따르던 사람이다。 어느날 자기 할아버지 만회공(晚悔公)의 묘도문자를 나에게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의 문행(文行) 재유(才猷)로 봐서는 세상에 쓰일 만한데 이름마저 알려지지 않고 끝내는 위포(韋布:벼슬하지 않음을 말함)의 몸으로 세상을 뜨시니 준섭(俊燮)의 마음이 매우 슬픕니다。 한마디 말을 적어 영원히 썩지 않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라고 한다。 나는 그 성의(誠意)에 감동(感動)하여 행장(行狀)을 보고 글을 쓰게 되었다。 공(公)의 휘는 재호(在浩) 자(字)는 덕현(德賢)이며 옥천세가(玉川世家)로 고려대장군(高麗大將軍) 장(璋)이 시조(始祖)이다。 몇 대 지낸 다음 문하시중(門下侍中) 원길(元吉)은 책훈(策勳)으로 부원군(府院君)에 봉(封)하였고 충헌(忠獻) 시호(諡號)를 받았다。 또 그 아들 유(瑜)는 부정(副正) 벼슬을 지냈으나 조선조(朝鮮朝)에는 벼슬하지 않았고 또 그 아들 병사(兵使) 시호(諡號) 절민(節愍)인 숭문(崇文)과 손자 교관(敎官)을 증직(贈職)으로 받은 철산(哲山)은 단종(端宗)을 위하여 순절(殉節)한 관계로 둘 다 정려(旌閭)가 있다。 공의 증조(曾祖) 현목(顯穆)은 행의(行義)가 온 고을에 모범이 되어 증직으로 좌승지(左承旨)를 받았고 조(祖) 기재(基在)는 증직(贈職)으로 호조참판(户曹參判)이 되었으며 부(父)는 진충(鎭忠) 어머니는 나주오씨(羅州吳氏) 통정(通政)을 지낸 상구(相龜)의 딸이다。 순조(純相) 무진(一八○八)년 二월 八일에 태어나 임오년 七월 二일에 七十五세로 세상을 떴다。 공(公)은 성품(性稟)이 단목(端穆)하여 어렸을 때부터 큰 인물이 될 것을 다짐하였고 그 고을 지부(知府) 김 정균(金鼎均) 역시 공(公)을 볼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성(精誠)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겨 얼굴을 부드럽게 하고 뜻 받들기에 힘을 쓰고 상(喪)을 만났을 때는 三년 동안 素食을 하였으며 제사 지낼 때는 재계하고 밤을 새웠다。 그리고 우애(友愛)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한 집에 모여 춘진(春津)과 같이 화목한 즐거움을 누렸으며 집안 살림도 법도 있게 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는 반면 집안사람에게 새로운 서양(西洋) 물건을 일체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자질(子姪)을 가르칠 때와 족척(族戚)을 대접할 때에 그 도리를 다하였고 벗들과도 역시 그러하였으니 이는 모두 공의 효제(孝悌)로 인한 것이다。 승낙하기를 신중히 하고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며 빈궁(貧窮)한 것을 걱정하지 않았고 지조를 굳게 지키고 몸가짐을 조심하였으며 평상시 책 머리에 숭정연호(崇禎年號)만을 쓰면서 하는 말이、 『나는 대명(大明)의 유민(遺民)이다。』 라고 하였고、 병인양요(丙寅洋擾)때 사방이 술렁거리자 읍재(邑宰)가 보장(堡障)할 대책을 묻다가 공에게 위임(委任)하니 공(公)이 분해하면서 하는 말이、 『내가 만일 효종(孝宗) 때를 만나 저 북방 요동지방 눈바람 속을 달리게 되었더라면 오랑캐와 서로 겨루는 일을 어찌 남에게 뒤졌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공이 평소에 간직하고 있었던 뜻이었다。 임오년 공은 두 번이나 고을에서 실시하는 초시(初試)에 올랐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공에게 호적을 고쳐 나이를 올려 빠른 길을 찾으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공은、 『임금을 속여가면서까지 과거에 오르려 하는 것은 나로서는 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거절하였다。 그해 여름 군(郡)에서 치루는 시험을 보러 갔다가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시험을 치루지 못하고 무더위를 무릎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병을 얻어 그 증세가 악화되고 말았다。 죽게되자 옷깃을 바로하고 앉아 뒷일을 하나하나 부탁했지만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뜻은 없었다。 다음 달 순천(順天) 서쪽 주암면(住巖面) 용강(龍岡) 마을 간원(艮原)에 장사하고 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와 합장을 하였다。 공은 두 부인을 두었으나 모두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이씨(李氏)의 아버지는 진래(鎭來)이며 진원박씨(珍原朴氏)는 가선(嘉善)을 지낸 민환(敏煥)의 딸로 정순(貞順)하여 부덕(婦德)이 있었다。 공이 중형(仲兄) 한호(翰浩)의 아들 병은(秉恩)을 데려다가 양자를 삼았는데 三남 一녀를 두어 준섭(俊燮)은 큰아들 그다음은 기섭(璣燮) 두섭(斗燮)이며 딸은 김화수(金華壽)에게 출가하였다。 아! 공(公)은 청신(清愼)을 지키고 지절(志節)을 숭상하여 일상생활에 조그마한 일에도 풍속을 따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그의 행의(行義)는 집밖을 벗어나지 않아 세상을 다스릴만한 재주로 임천(林泉)에 헛되이 버려졌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안으로 행실을 돈독하게 하였으니 밖에 구할 것은 또 무엇이 있겠는가! 이 사실을 돌에 새길 뿐이다。 다음과 같이 銘한다。 뛰어난 공(公)의 성품 姿出於天 치력(致力)에 더욱 아름답고 匪公致力 돈독한 공의 행실(行實)、 行篤於身 풍속(風俗)의 모범이 되었네。 亦可範俗 썩지 않을 이 여기 있으니、 不朽者存 그 나머지 것임에랴。 其餘可略 용강(龍岡)의 언덕 위에、 龍岡之原 물은 맑고、 산은 높으니。 水淸山肅 잠긴 빛을 드러내어、 我發潛光 천추만대(千秋萬代)에 비추게 할까 하노라! 昭示千億 德殷 宋秉璿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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